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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을 위한 실험

[에세이] 민주의 실험_대충먹는 밥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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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민주의 실험_대충먹는 밥상

2021. 2. 8. 12:00

#끼니를_때우다 #요리_의미_찾기
#요알못의_요리도전기

나는 9 to 6 사무실에 출근하는 직장인이다. 독립해서 살고, 고정적인 수입이 있게 된 지 2년 남짓. 돈도 있고 시간도 있으면 더 잘 먹고 다닐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맛있고,  맛없고의 구분이 도무지 안가지만 사실 내가 하는 요리는 98% 맛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도 별로 상관이 없었다. 하루를 꽉 채워 의미 있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강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모든 일을 꼼꼼하고 잘 해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유독 먹는 일에 대해서는 소홀한 나 자신을 발견했다. 실험을 시작하며 텃밭을 돌보고, GMO를 파헤치고, 공장식 축산을 멀리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수많은 ‘의미 담긴’ 노력을 했지만, 두유나 빵 한 조각 정도로 때우고 있었다. 좋은 먹기를 실천한다면서 정작 ‘먹기’를 즐겁게 하지 않는 나의 모습이 이상했다. ‘가장 충만한 즐거움을 가지고 먹는 것’이 도대체 뭘까? 나는 내 삶에서 거들떠보지 않았던 ‘먹는 행위’에 의식을 두고 정성을 들여 보기로 했다. 그래서 정한 나의 규칙! <하루에 한 끼는 꼭 제대로 요리해서 먹기> 요리할 때는 요리만 하고, 밥 먹을 때도 밥만 먹자!


2020년 7월 9일
요리는 창조라는데, 아는 것이 없는 나는 재료 선택부터 어렵다. 온오프라인에 쏟아지는 수많은 레시피는 실상 나 같은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다. 너무 많아서 오히려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단’ 레시피라면서 왜 이렇게 간단치가 않은지, 준비할 게 뭐가 많아 보여서 시작부터 머리 쥐고 공부하는 느낌이다. 그래도 일단 해보자! 재료 공수는 더 고민하다가 지칠 것 같아서 눈에 잡히는 것부터 도마 위에 올리기로 했다. 나는 주로 1.냉장고에 있던 엄마 반찬  2.텃밭에서 가져온 작물 3.사무실에서 직원들이 시켜 먹고 남은 것 이 세 가지 통로로 재료를 구했다. 사실 색다른 재료를 사려고 해도, 어떻게 조리해야할지 어떤 맛이 날지 상상이 잘 가지 않으니 입맛만 다시다 돌아온다. 엄마가 준 마른 반찬은 주로 오니기리의 재료로 쓰인다. 나름대로 다르게 해보겠다며, 멸치 오니기리, 진미채 오니기리, 멸치+진미채 오니기리. 이렇게 탄생시킨다. 비율을 다르게 하면 무한증식이 가능하다^_^
나에게는 감사하게도 작물을 수확할 수 있는 텃밭이 있다. 여름이라 텃밭에서 가지, 호박, 감자를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 달 내내 야채를 구워 먹고 볶아 먹고 끓여 먹고 그랬던 것 같다. 감자 하나로 최대한 다양한 요리를 해보려고, 쪄먹고, 찌개로 먹고, 카레로 먹고, 샐러드로 먹고, 오트료쉬카라는 신기한 음식도 해봤다. 
사무실에서 남은 음식을 받아와서 요리할 때는 기분이 오묘하다. 사무실에서 더러 배달음식을 시켜먹을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는 것이 싫어서 남김없이 싸오곤 한다. 그런데 그렇게 툴툴대며 받아온 재료가 나의 저녁 식사를 오히려 든든하게(?) 채워줄 때가 많다는 것이다! 
남은 흰 죽에 야채와 참기름을 섞어 야채죽을 해먹고, 남은 김밥에 계란물을 묻혀 김밥구이를 먹고, 남은 보쌈은 살짝 더 삶아서 집에 있던 쌈을 더 얹어서 먹는다. 어떻게 이 재료를 잘 살려볼까 고민하는데, 새로운 재료라서 창조하는 기분이 더 쏠쏠하다. 마치 수학의 정석 기본 문제만 풀다가 응용에 들어간 느낌. 완성하고 나면 보기에도 더 그럴싸하고, 실제로 맛도 더 균형 있었던 것 같은데, 기분이 나쁜 건 왜일까...    

2020년 7월 18일
요리를 할 때 가장 힘든 점은 기다리는 시간이다. 가지가 맛있게 굽히기까지, 카레가 뭉근해지기까지, 스파게티 면이 다 익기까지의 십 여분 남짓 되는 시간. 그 십 분이 왜 이렇게 긴지. 나는 이제까지 그 시간에는 할 게 없다고 생각해왔다. ‘어떻게 그냥 가만히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을 수 있지? 뭐 할 게 있다고...’ 그래서 나는 실험을 하면서도 종종 방에 가서 다른 물건을 정리 한다던가 다른 집안 일을 한꺼번에 한다. 그러다 매번 사고가 터졌다! 가지는 너무 타 버리고, 카레는 너무 졸아서 건더기만 수북하고, 스파게티 면은 냄비 바닥에 붙기도 했다. 평소 같았으면, ‘에이 이 정도야’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을 거다. 그런데 의식을 하고 보니 맛이 없거나 보기 좋지 않아서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계속 지켜봐야 하나?  그러면 얘들이 잘 굽히고,  끓여지고, 익혀 지는 건가?’ 라고 툴툴거리다가, ‘그래 일단 부엌은 지키고 있자’며 후라이팬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생각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알게 되었다. 7~8개 되는 가지를 각자 적절한 때 뒤집으려면 잘 지켜봐야하고, 찌개는 야채가 익는 순서대로 차근차근 넣기 위해서 잘 익었는지 들여다보아야 하고, 면도 엉기지 않게 한 번씩 젓가락으로 들어 올려줘야 한다. 면발 올리는 거, 쉐프들이 폼 잡으려고 그러 는 줄 알았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숨 막히게 바쁜 행위도 아니었다. 잠자코 기다리다가 잠깐 손이 거들고, 조용히 기다리다가 또 한 번 손이 거든다. 부엌에서 그렇게 잠깐씩 살짝 멍 때리며 고요해지는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2020년 8월 19일
'자, 요리해볼까!' 하고 부엌에 서면 나는 가장 먼저 쌓인 그릇부터 눈에 보이지 않게 다 정리를 한다. 그런데 벽에 끼인 기름때가 거슬려서 행주로 닦는다. 그러다 그 옆의 조미료 병들의 배치가 거슬려서 다시 각 맞춰 정리를 한다. 그러다보니 냉장고 벽면에 붙은 엽서와 신문 조각들도 새로운 것들로 가져와 다시 붙여준다. 마치 공부를 하려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책상 정리부터 하는 모양이다. ‘오늘은 청소 안 해’라고 마음을 먹고 부엌에 서자마자 칼과 도마를 꺼내들어도, 결국 중간 중간에 나는 구석구석 행주질을 하고 있다. 요리를 하는 건지 정리를 하는 건지... 실험을 시작하고 나의 부엌은 더욱 깔끔해졌다^_^ 뜻밖의 횡재 

2020년 8월 xx일 
요리를 여러분 시도하고 나니 도시락도 싸는 것 정도는 이제 진땀을 빼지 않아도 된다. 코로나 이후 사무실에서 점심 식사가 중단되고 난 뒤로, 직원들은 점심을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밖에서 사먹는 것이 메뉴도 질리고 비싸기도 해서 도시락을 싸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초반에는 귀찮아하는 툴툴거림의 목소리가 더 컸다면, 이제는 다 같이 도시락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11시 50분 쯤 되면 마주앉은 과장님, 옆에 앉은 대리님과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띤 채 슬쩍 눈빛교환을 한다. 12시가 되면 각자 형형색색의 도시락 가방을 꺼내 풀어헤친다. 오늘은 뭘 해왔나 서로 구경하고, 한 번 먹어보라고 나눠주고, 요리하면서 겪은 좌충우돌이나 어디서 장 보는 게 좋다는 이야기도 나눈다. 누가 뭘 싸오느냐에 따라 매번 식탁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매번 대화가 달라져서 그 재미가 쏠쏠하다. 다들 저녁에 퇴근 하고 집으로 돌아가 내일의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2020년 8월 xx일
먹기에 온전히 집중한다는 일이 잘 이해가 안 되었다. ‘왜 굳이....?’라는 심정이었다. 끽해봐야 나는 재료를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을 알고 먹겠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요리에 정성을 들이다보니, 먹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변화했다. 썰고, 볶고, 색 조합도 신경 쓰고, 가장 어울리는 접시를 꺼내 담고, 수저까지 가지런히 놓고 나면, 바로 입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한 번 눈으로 쭉 식탁을 훑어보게 된다.(왜 사람들이 사진찍고 싶어 하는 지 좀 알겠다.) 
숟가락으로 조금 떠서 간을 보고, 재료를 하나씩 집어 들고 하나하나가 잘 익었는지 맛보고, 전체적으로 잘 어울리는 지도 음미한다. 정말 자연스럽게 다른 생각에 잠기지 않게 된다는 게 신기했다! 그릇을 천천히 비우고 나서도 후다닥 상을 정리하기 보다는 혼자 뿌듯해서 괜히 배를 스윽 문지르며 흐뭇~한 표정을 짓게 된다. 음~ 잘 먹었군! 
 
2020년 8월 26일
아직 나는 배우고 싶은 것이 많다. 춤도 추러 가고 싶고, 요가도 하러 가고 싶고, 위빙도 하러 가고 싶고.. 그래서 평일 저녁은 주로 이런 것들을 배우러 다닌다. 그런데 9시부터 6시까지 사무실에 있다가 바로 출발해야 시간을 맞출 수 있으니, 저녁식사가 매번 애매하다. 부랴부랴 버스를 타고 멀리 나가려면 뭘 먹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으니 매번 편의점에서 두유를 사거나 길거리에서 빵을 먹곤 한다. 그나마 고상하게(?) 먹고 가려면, 근처 공원을 찾아 벤치에서 먹는 것. 그런데 그런 공간을 찾기도 어렵거니와 이제는 코로나 때문에 밖에서 마스크를 벗기도 눈치가 보인다. 퇴근 하고 바로 일정이 빽빽한 내가 잘 먹고 다니려면 어쩌면 좋을까? 춤도, 요가도, 위빙도 다 하고 싶은 내 욕심일까?

2020년 9월 2일
어쩌다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데, 친구가 샌드위치와 커피를 가져왔다. 이야기를 나누며 먹었다. 전화와 메일 몇 통을 주고받고, 문서작업을 하다 보니 눈앞에 골뱅이 소면무침이 나타났다. 점심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먹고 잠깐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오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일 시작. 고개를 들었는데 밖이 캄캄했고, 매콤한 냄새가 났다. 벌써 밤이라고? 부엌에 가서 떡볶이를 하던 친구에게 “미안해, 내가 오늘 하루 종일 얻어 먹기만 하네.”라고 말했다. 친구는 입을 빼쭉거리며 “너 몸 건강 생각한다며, 왜 이렇게 몸한테 소홀하니?”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종일 얻어먹으며 일만 했다. 세 끼나 얻어먹게 되었다는 것보다, 친구가 차려준 샌드위치와 골뱅이 소면무침의 맛이나 그 때 나눴던 대화가 단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음식을 준비하며 고민했을 그 친구의 마음을 하나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너무 속상하고 미안해서 떡볶이를 먹다, 참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도대체 난 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곁에 있는 사람이 내어주는 따뜻한 마음도 잘 받지 못하면서 어떤 거창한 것을 하겠다고 하루를 보냈던 걸까? 다시는 이러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