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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을 위한 실험

[에세이] 지윤의 실험_기생하는 밥상 본문

카테고리 없음

[에세이] 지윤의 실험_기생하는 밥상

2021. 2. 8. 11:48

#기생하는_학생 #염치있는_기생
#가끔은나도요리사 #가끔주의


1. 실험대상 
여기 18(+α)년째 학생인 사람이 있다. 태어나 딱 두 달간을 빼고 집을 떠나 살아본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다. 그만큼 내 입에 들어가는 음식은 우리 집 식단을 책임져 온 엄마의 손에  의존해 왔다. ‘ ‘먹는 것이 곧 나’라는 일념으로 안전하고 건강한 식재료를 물색해 온 엄마는 35년째 한살림, 아이쿱 생협의 고객이다. 나와 형제들이 어릴 땐 단체급식을 먹이는 게 찜찜하다고 대안학교를 보냈으며, 나 고3 때는 급식을 대신할 도시락을 싸 주셨다. 지금은 집에 과일과 채소, 해산물을 구비해 놓고 매일같이 반찬과 국을 요리하신다. 지금껏 나는 내 손으로 식재료를 구매하고 손질하고 불 위에 올리는 수고로움 없이 영양가 있는 한 끼를 먹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엄마를 둔 덕에 받아
먹는 마음이 늘 편하지만은 않다. 

TMI 집에서 청소, 분리수거, 빨래 담당. 무슨 일이든 무난하고 차분하게 해내는 성격. 비 육식을 지향한 지 5년째. 식탐도 적고 위장도 작은 편. 식사시간을 최소화하고 할 일에 몰두하는 것을 선호했던 가성비 덕후.


2. 실험 전 _ 기생해도 괜찮...나? 
내가 실험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엄마의 밥상에 기생하면서 느끼는 불편한 감정이었다. 이십 대 후반이 될 때까지 거의 항상 부모님과 함께였고 또래 친구들이 취업하여 경제적 독립을 꿈꿀 때 나는 학교를 한 번 더 가리라 마음먹었다. 경제적 독립은 다시 요원해졌고 나는 기약 없는 기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엄마는 영양과 구색을 모두 중시해서 늘 반찬이 몇 개씩 올라가는 풍성한 밥상을 차렸다. 그 밥상을 받는 나는 꼬박꼬박 고마움을 표현하는 딸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이거 진짜 맛있어요”, “고생하셨어요”는 내 단골 대사였다. 말로만 표현하는 건 염치없으니 곧잘 뒷정리와 설거지를 도맡아 했다. 하지만 비누거품과 달리 미안함과 죄책감은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 엄마는 한 끼를 차리려고 부엌에서 몇 시간을 서 있는데 고작 십 분의 설거지로 그 수고로움을 상쇄할 수 있는 건가? 그녀가 나로 인해 더 많은 노동을 하게 된다는 것, 그녀의 고생이 나한테 기인한다는 생각은 상당히 무겁고도 부담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엄마가 덜 힘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엄마, 대충(혹은 간단히) 먹자.”라고 무책임한 말을 해대는 것이 내가 죄책감을 더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외식이나 라면 따위로 매끼 식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때로 찜찜하게, 대개 별생각 없이 차려지는 밥상을 받았다. 쿰에서 시작한 ‘잘 먹기 실험’은 이 미세한 불편함을 해결할 기회였다. 


3. 나의 실험 

실험 목표
1.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부채감 해결
2. 스스로 밥을 해 먹을 수 있다는 자신감 증진

실험 규칙
1. 집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활용
2. 30~40분 내외로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요리
3. 실험이 일상에 자리 잡도록 꾸준히 실행
4. 무엇보다 맛에 최선을 다할 것

실험 기간 및 내용
1단계 : 2020년 6월 17일~7월 6일 (약 3주)
매 끼니 먹는 음식의 종류를 수첩에 적고, 그중 해먹고 싶은 요리법을 검색해서 메모하거나 단톡방에 공유했다.   
2단계 : 2020년 6월 22일~현재진행중
주로 혼자 집에 있는 낮, 혹은 저녁에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로 생각나는 음식을 만들었다. 혼자 또는 가족, 친구와 나누어 먹었다. 고정된 날짜는 정해져 있지 않고 한주에 1~2번 정도. 

조리 방식
먼저 집에 있는 재료의 조합으로 만들 수 있고 구미가 당기는 메뉴를 떠올린다. 여기에는 약간의 센스가 필요한데 나에겐 적당히 있는 듯. 인터넷이나 요리책에서 만드는 법을 확인하고 내 처지와 기호에 맞게 약간 변형시켜서 만든다. 

실험한 음식
애호박 국수, 매콤한 버섯칼국수, 샤브샤브, 떡볶이, 오므라이스, 김치볶음밥, 오뎅탕, 된장찌개, 두부조림과 콩나물국, 호박나물·가지나물·양배추 볶음·김치볶음·오이지 무침·계란말이 등 반찬류, 무채 부침개,  두부 가지 덮밥, 잡채, 야채 튀김, 간단한 야채구이, 프렌치 토스트, 샌드위치, 호떡

평가
평균 조리시간 30~40분 내외. 
심하게 망한 음식 없으며 비주얼 그럴듯함.
삼삼하기보다는 슴슴한, 평균 7.5/10점 정도의 맛.
본인의 주관적 기준임을 유의. 
고객 만족도는 ‘보통’~‘만족’ 수준. 
 
실험 결과
1. 몸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식사를 중요히 여기게 됨
2. 음식을 보기 좋게 담고 구색을 맞추고, 식은 음식을 데우거나 양념을 더해 먹게 됨
3. 한 끼를 잘 먹기 위해 칼을 쥐고 불을 쓰는 일이 만만하고 뿌듯하게 느껴짐
4. 식구들에게 한 끼를 대접할 수 있게 됨
5. 식사 준비가 결코 무의미한 노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음 
6. 기생에 대한 정의가 바뀜
7. 엄마에 대한 감정이 미안함에서 고마움으로 변화함
8. 요리를 능가하는 살림의 복잡함을 깨닫게 됨                  


4. 실험 후_ 기생해도 괜찮아, 단... 
나는 여전히 한 달의 대부분을 엄마의 밥상에 기생한다. 엄마의 수고가 들어간 음식 덕분에 결핍감 없이 온종일 필요한 활동을 해낼 수 있다. 지금 나에게 요리, 나아가 잘 먹기란 집에서 많은 시간이 확보되었을 때 마음을 내어서 하는 행위 혹은 이벤트에 가깝다. 하지만 이전과 같은 기생은 아니다. 실험 초기에는 의무감 반, 동료들에게 보여주려는 마음 반으로 식사를 준비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잘 차린 밥상을 먹을 때의 기쁨과 만족이 있다. 그리고 맛있게 먹는다. 먹는 일까지 효율을 따지던 가성비 덕후에게는 가장 큰 변화다. 또한, 똑같이 기생하는 처지여도 다양한 형태로 기생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이라 민망하지만 주말 저녁에 이따금 부모님께 식사를 차려 드린다. 전체 밥상을 차려 내는 건 여전히 어렵지만 말이다. 이전에는 만들어진 반찬만으로 밥을 먹었다면 요즘은 엄마가 만든 반찬 혹은 국에다가 내가 한 음식을 하나쯤 더해 먹게 될 때도 있다. 여전한 기생이지만 괜히 기분이 더 좋다. 이때의 밥상은 창조적 기생이라고 부를 수 있지않을까? 실험을 시작할 때 나는 기생하지 않는 독립된 먹기를 꿈꾸었다. ‘잘 먹기’란 기생하지 않고도 자급자족이 가능한 먹기라고 여겨 마음이 조급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생하는 삶의 양식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살아가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기생하거나 기생의 터전을 제공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먹이는 행위는 가장 원초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내가 실험의 형식을 빌려 겨우 접근한 그 일을 누군가는 생색도 없이 매일같이 해낸다. 그리고 그 덕분에 식구들의 하루가 온전하게 굴러간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미안하기보다도 숙연하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지금 나는 빨리 독립할 궁리보다 어떻게 하면 ‘잘’ 기생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어쩌면 조금 뻔뻔해진 셈이다. 잘 기생하는 방식은 맛있게 밥을 먹고 마음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직접 요리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일 수도, 부엌 운영에 참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기존의 수동적인 받아 먹기만 아니면 된다. 다양한 시도로 인해 지금보다 훨씬 더 즐겁고 생산적인 기생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어쩌면 숙주께서도 즐거울 수 있고 말이다. 지금도 나는 충분히 잘 기생하고 있는지 고민한다. 나름대로 이뤄낸 변화를 지속하는 것 또한 앞으로의 과제다. 학기가 시작되면 바쁜 일상에 치여 먹기에 도로 소홀해질까 봐 겁이 난다. 요리는커녕 한 끼를 음미하며 먹는 일이 사치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그때의 고민을 발판 삼아 새로운 실험을 기획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