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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을 위한 실험

[에필로그] 끝나지 않은 실험 - 다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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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끝나지 않은 실험 - 다진

2021. 2. 16. 09:36

먹기 실험 이후, 나는 참 많~~이 변했다. (라고 얘기하고 다녔다.) 실제로 그렇다. 실험 초기, 냉동채식까스를 겨우 해먹던 내가 식혜랑 잼을 만들어 선물하게 되었으니. 실험이 종료된 이후에도 나는 요리 실험을 지속하며 간간이 내가 해먹은 음식들을 단톡방에 올리곤 하였는데, 그런 나를 보고 언니들은 '못 본 새 장금이가 다 되었네~'라며 북돋아주었고 나는 그것이 내심 기분이 좋았다. 



1. 혼자서도 잘 해먹어요. (feat. 언니네텃밭 꾸러미)

본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나는 실험 이후 언니네텃밭에서 격주로 꾸러미를 받아 먹게 되었다. 여러 꾸러미 중에서도 내가 선택한 것은 '나와 지구를 살리는, 채식꾸러미'! 매주 혹은 격주로 그때그때 다른 제철채소 4~5종과 두부 한 모, 간식거리 등을 보내주는 구성이다. 이전에는 대개 메뉴를 미리 골라두고 그에 필요한 재료들을 한살림 등에서 사오는 식이었기에, 주로 해먹는 요리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언니네텃밭 꾸러미를 신청한 뒤로부터는 랜덤으로 오는 재료들로 매번 색다른 요리를 해먹게 되니 집밥에 정을 붙일 수 있었다. 꾸러미를 받아보지 않았더라면 언제 해먹어볼까 하는 재료와 요리도 있었고, 콩나물전 냉이간장파스타 등 새로운 요리를 시도해보기도 했다. 꾸러미를 보내주실 때면 매번 그 주의 품목과 생산자, 요리법 등을 담은 소식지를 같이 보내주시는데, 초기에는 난생 처음 요리해보는 재료들을 어떻게 해먹어야 할지에 대한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그 종이를 보고 있을 때면, 내게 오는 채소들이 봉강공동체 분들이 열심히 농사지어 보내주신 것이라는 게 와닿아 그것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요리해먹게 되었다. 냉장고 속 채소들에게 느끼는 책임감과 감사함은 덤이다. 지금은 이사를 앞두고 있어 잠시 꾸러미를 쉬고 있지만, 3월부터는 내 상황에 맞춰 1인 꾸러미를 시켜먹기로 했다. 언니네텃밭 꾸러미를 신청한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무엇보다 요리실력이 많이 는 것 같아 뿌듯하다.(장금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요린이 2단계 정도..?) 앞으로도 요리실력을 계속 늘려나가 언젠간 형장금이 되기를-!

 

냉이의 변신은 무죄 ~.~ 냉이간장파스타
알고보면 가장 쉬운 잼 만들기. 무른 귤은 귤잼으로-

 

2. 웰컴 투 마이 하우스

언니네텃밭 꾸러미의 좋은 점도 있었지만, 한 가지 애로사항이 있었다. 바로, 2주를 꼬박 해먹어도 남는 채소들이었다. 받은 아욱의 4분의 1로 아욱된장국을 끓여 3일 동안 먹을 지경이었으니, 물려서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은 아욱을 어찌해야 할지 곤란했다. 이리저리 궁리하던 내가 처음 선택한 방법은 일부를 나눔하는 것이었다. 쿰 단톡방에 나눔할 채소들을 나열하고 필요하신 분께 직접 배달해드리기로 했다. 첫 주에는 그렇게 적정량을 맞췄다. 그러다 사람들을 초대해 요리를 해먹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어 조만간 보기로 한 친구에게 우리집에 초대해서 내가 저녁식사를 만들어주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렇게 친구를 한 명 두 명 초대해 정성껏 식사를 차려먹게 되었다. 친구를 초대하니 좋은 점은 스스로 재료 선택과 메뉴 선정을 할 수 있으니 사람들과 외식을 할 때 겪는 갈등을 겪지 않아도 되고, 친구와 함께할 때도 보다 건강하고 윤리적인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그 즈음에는 마음이 기쁨과 뿌듯함으로 넘실거려, 평소에 좋아하던 고기류나 자극적인 음식 없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평소에도 가족들과 생선을 즐겨 먹는다던 지인이와의 식사

 

본가에서 올라온 배고픈 유진이에게 정성스런 집밥 한 끼

 

3. 온라인 실험과 더불어

비록 지금은 공중분해되었지만, 우리는 먹기 실험 이후 좋은 삶을 위한 2차 실험으로 '온라인' 실험을 선택했다. 온라인 가상세계(관계)와 단절하고, 잃어버린 '진짜' 삶과 관계를 찾아가는 취지의 실험이었다. 나는 먹기 실험과 융합한 실험을 하게 되었는데, 바로 인터넷 레시피에 의존하지 않고 요리를 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인터넷 레시피 없이는 요리를 할 수 없었다. 그것을 보고 따라 한들, 요리 실력이 늘거나 하지는 않았다. 화면을 기웃거리며 요리를 하다보면 어느새 황금레시피가 완성되었지만, 맛있게 먹고나면 땡이었다. 같은 요리를 하려 해도 다음 번에 'xx 황금레시피'를 다시 검색해야 했으니 말이다. 인터넷 레시피를 보지 않기로 하고, 초기에는 책을 참고하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사람들에게 묻게 되었다. 나의 가장 좋은 선생님이 되어준 건 단연 할머니였다. 어떤 요리를 하고 싶은데 조리법을 모를 때면, 할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비지는 어떻게 끓여?" 그러면 할머니는 "그그.. 저저.. 비지는 어떻게 끓이냐면-" 하면서 요리법을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정해진 양이나 비율도 없어, 할머니가 알려준 대로 따라하며 최상의 맛을 찾아갔다. 이렇게 요리를 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간을 맞추다 무엇인가 부족한 것 같으면, 그것이 떠올라 스스로 맛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레시피에 의존할 때는 있는지도 몰랐던, 요리의 '감'이라는 걸까? 나의 레시피를 만들어가는 기분이 아주 쏠쏠했다. 무엇보다 이번 계기를 통해 할머니랑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좋았다. 올해 가을에는 할머니의 김장을 돕기로 했는데, 앞으로 된장 고추장 깍두기 ·· 배울 게 천지다.

설탕 대신 마스코바도를 넣어 미소된장국 같은 식혜
손바느질로 질금주머니 만들기까지, 할머니한테 손수 배워온 식혜 만들기

 

4. 나는, 아직도

본 글에서는 친구들과의 식사자리에서 '즐거움을 잃어버리지 않고도 충분히 좋은 먹기를 실천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나의 성급한 결론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사실 나는 이와 관련하여 친구들과의 갈등이 있었고, 사이는 회복되었지만 우리의 식사자리는 변함이 없었다. 내가 그냥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한식집이나 인도커리집처럼 메뉴 선택의 폭이 넓은 식당을 선택해 갈 수도 있었지만, 이것 역시 나를 억압하는 것처럼 느껴져 그러지 않았다. 친구들과 외식을 할 땐, '생각 없이'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게 나의 타협점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래도 되는 걸까- 앞으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고백하자면, 친구들과의 식사자리에서 뿐만 아니라 혼자 있을 때도 나는 종종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선택을 한다. 배달음식은 거의 시켜먹지 않게 되었지만 나는 종종 교촌치킨을 포장해와서 먹고, 자극적인 음식을 놓지 못해 '식품'을 소비하며 많은 쓰레기를 배출한다. 치킨은 아직 나에게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어.'라는 음식이다. 그렇다고 치킨만 먹는 것은 아니고, 특히 가족과 함께 있을 때는 음식에 대한 경계가 대부분 희미해진다. 여기서도 일말의 죄책감은 언제나 따라오지만 말이다.

지금도 완벽하지 않은 나의 식사는 언젠가 완벽해질 수 있을까? 완벽하진 않을 지라도, 내가 좀 더 건강하고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