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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을 위한 실험

[에필로그] 도시락 매니아의 반성문- 민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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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도시락 매니아의 반성문- 민주

2021. 2. 15. 13:57

<도시락 매니아>

이제 아침에 일어나 도시락 두 개 싸는 것 정도는 허둥대지 않고 척척 할 수 있다. 물론 일상 곳곳에서 도시락님을 떠올려야한다. 일주일에 한 번은 퇴근길 채소가게에 들려 매대에 나온 채소 한두 가지를 사고, 방을 닦거나 샤워를 하면서 어떻게 요리해 먹을지 여러가지 방안을 짠다. 가방만한 배추 한 포기를 이천원에 샀었는데, 배추국 배추지지미 배추전 배추된장무침 배추계란볶음밥 배추겉절이로 질리지 않게 먹고 먹었다.

다음날 도시락 메뉴는 자기 전 날 정해진다. 눈을 감고 '내일 뭐 싸가지...'하는 고민을 끝내야 잘 수 있다. 냉장고 메모지에 도시락 메뉴를 적어두기도 하지만, 그대로 되진 않고 매번 전날 먹고싶은 것으로 선택한다.

저녁 일정까지 있는 날에는 두 개를 준비한다. 같은 것만 먹고 싶진 않으니 꼭 두 종류로 만든다. 8시 30분에 집을 나서야하는 나는 보통 6시30분에 일어나서 요리를 한다. (친구들은 내 기상시간을 들으면 깜짝 놀라는데, 도시락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건 아니고 이전에도 이 시간에 일어났었다ㅠㅠ)

간단하게 싸갈 때는 현미밥에 집에 있는 반찬만 예쁘게 넣고, 어떨 때는 주먹밥이나 볶음밥을 하기도 한다. 카레, 떡미역국, 야채덮밥은 한그릇에 뚝딱 가능하니 아~주 착한 메뉴다!

아침에 두 개의 도시락을 준비해야할 때는 정신을 초집중할 수 있다. 어떤 날의 메뉴는 계란국과 볶음밥이었다. 일어나자마자 냄비에 물을 받아 다시마를 넣고 끓일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각종 채소를 탁탁탁 썰어 놓는다. 물이 끓으면 계란을 넣고 후추 소금 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파도 듬뿍 넣는다. 옆에 후라이팬을 올려서 기름을 두르고 채소를 딱딱한 것부터 달달 볶는다. 똑같이 간을 하고, 전날 식혀놓은 밥을 넣고, 마구마구 볶는다. 오른쪽에선 국이 끓고, 왼쪽에서는 밥이 볶여진다. 생각보다 조용하게(?) 도시락 두 개가 완성된다. 이제 점심 때 김민주의 결정에 따라 저녁 도시락이 결정된다.

평소에 가방에는 책 한권과 공책만 넣고다녀서, 도시락 두 개를 가져가는 날에는 도시락 가방만 한 짐이다. 그런 나를 보고 친구는 "도시락 먹으러 회사다니냐"고 말한다. 왠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손가방보다 큰 도시락 가방

책가방만한 도시락 가방 둘

 

 

<그대들의 도시락>

이제 사무실에서 "뭐 먹으러 갈거에요?"보다 "뭐 싸왔어요?"라고 묻는 게 익숙해졌다. 대리님들도 자주 도시락을 싸오기 때문이다. ㅈ대리님은 점심 때 포장마차의 오뎅을 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도시락을 싸올 때는 주로 간단한 야채, 고구마, 계란를 가져온다. 양배추를 많이 가져왔을 때 좀 좋았다. ㄱ대리님은 꼬박꼬박 도시락을 싸온다. 집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꼭 잡곡밥에 반찬 서너가지는 가져온다. 그의 최애반찬은 토마토달걀볶음이다. 최근에는 집에서 젓갈을 많이 가져왔는지 젓갈이 계속 등장했다. 아! 작은 팩에 든 김도 꼭 챙겨온다.

어느날은 외박을 한 날이었다. 12시, 점심시간이 됐다. ㄱ대리님이 "밥 싸왔어요~?"라고 물었다. ㅈ대리님은 그렇다고 했고, 나는 못 싸왔다고 말했다. 두 대리님이 "에에에에?????"하며 놀랐다. 진심으로 놀란 표정에 나도 놀랐다. "이런 날도 있어????? 민주쌤만 안싸왔다고?????"

나는 멋쩍게 웃었다. 잘못한 건 아닌데 지금은 좀 잘못한 것 같기도하고, 그런데 지금까지는 잘한 것 같기도하고... 허허 웃으며 사무실을 튀어나왔다. 그리고 혼자 맛있는 순두부찌개를 먹고 들어갔다.

그대들의 도시락-흔한 직장인의 점심시간

<반성문>

1월 23일 토요일, 코로나로 연기되었던 2020쿰 마지막 모임을 조촐하게 가졌다. 8시 이후로 교육을 진행할 수 없어서 그만 헤어져야했다. 이대로 헤어지긴 아쉽고 식당은 갈 수가 없어서, 적은 인원이니 내 집으로 가기로 했다.

버스를 타러 걸어가는 길이었다. 희진이는 늦게 왔고, 우리도 계속 빵으로 배를 채웠던 터라 늦었지만 뭘 먹기로 했다.

내가 "뭐 먹을래?" 하고 물을 때 사실 내가 먹고 싶은 것은 정해져있었다. 희진이는 내 마음을 읽고야 말았다. 눈썹을 두 번 꿈틀대며 눈빛을 교환했다.

"...엽떡?"

역시 희진이. 나는 활짝 웃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엽떡을 좋아한다!!! 그 자극적인 맛!!! 그런데 혼자 있을 때는 양이 많기도 하고, 매운 것을 못 먹는 친구가 많아서, 다행히 유혹을 뿌리치기 쉬웠다. 그런데 오늘같은 날은 포기할 수 없다. 같이 먹어줄 수 있는 사람이 서너명이나 있으니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엽떡? 시킬까?"

"..시킬래?"

"...시켜도 될까?"

떡볶이로 메뉴는 정해진 것 같은데, 다들 머뭇거렸다. 아 그렇지. 쿰에서 좋은실험얘기도 하다 왔는데... 일단 버스를 탔다.

"근처에 다른 떡볶이집 있나?"

"어.. 신떡은 봤는데.."

"아 맞다! 예전에 민주집 놀러갔을 때 근처 분식집에 통 가져가서 담아왔잖아!!! 기억나지?"

"아 맞다맞다! 거기 문 열었나 지금?"

"지금은 안 열었을 것 같은데.."

"아 어쩔까.."

"아니면 좀 걸어볼까?"

다들 배도 고프고 오래 헤매고 싶진 않았는지 말이 없었다. 그리고 모두 떡볶이로 일심동체가 되어서 다른 메뉴는 끼일 수가 없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말했다.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하겠다. 내가 먼저 말했던 것 같다.

"시키자!"

"그래! 시키자!"

"다진아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근처 가까운 매장 알아볼게"

아직 버스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이미 배달 가능 지점과 가격까지 다 파악했다. 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터널만큼 길었던 우리들의 고민이 싹 사라진다. 뭔가 허탈해서 마지막으로 제안을 해봤다.

"재료 사가서 만들어 먹을까? 지윤이가 만들래?"

나는 자신없고 지윤에게 슬쩍 떠넘겼다. 지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다진이는 옆에서 아무말 않고 눈치를 봤다.

희진이가 말했다.

"언니언니 왜 그래~~~! 그러지마! 시키자!"

그리고 덧붙였다.

"오늘 먹고, 언니 이 플라스틱통 끌어안고 살아~~~"

희진이가 유쾌하게 말한 덕에 푸하하 웃으며 '그래 먹자!' 싶었다. 이미 강을 건너버렸구나!

집에 도착해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다, '왜 안오지..?'라고 하자마자 딩동-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분위기가 활기차졌다. 이제까지 무슨 말을 했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몰입해서 먹었다.

그 날의 엽떡은 모두에게 '이제껏 먹은 엽떡 중 세 손가락에 든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는 그 다음날 바로 플라스틱통을 눈에서 치워버리긴 했지만, 꽤 오래 엽떡을 안 먹어도 될 것 같다. 희진이의 말이 떠오르면서 웃음이 먼저 나기 때문이다.

+ 사진은 (1) 손가방보다 큰 도시락 가방 (2) 책가방만한 도시락 가방 둘 (3) 후기글을 썼는데 아니나다를까 두 대리님의 도시락은 여전했다.